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태지와 아이들 (문단 편집) === 서태지와 아이들 신드롬 ===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나와 뜬 서태지와 아이들''' >'''10대들의 맘을 잡아 끈 음악과 춤''' >---- >[[개리(래퍼)|개리]], [[싸이]]의 [[싸이6甲 Part 1#77학개론 (Feat. 리쌍, 김진표)|77학개론]] 中 > '케이팝의 그 무언가'가 아닌 '케이팝의 모든 것' >[[https://brunch.co.kr/@sunuphwang/193|빌보드매거진코리아 2호]] >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과 은퇴는 '''한국 가요사에 가장 의미 있는 사건''' >1999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9122300209153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9-12-23&officeId=00020&pageNo=53&printNo=24386&publishType=00010|MBC-한국갤럽 조사]]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이후, 한국의 대중가요계는 성인가요와 발라드 위주에서 10대 취향의 댄스음악 위주로 재편되었으며, 단순히 트렌드의 변화와 차원을 달리하여, 영미 [[대중음악|팝]]이 한국 음악, 특히 젊은이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끼지던 시절에 이들은 영미 팝 가수들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가지고 있던 영향력, 특히 "10~20대의 지분"을 송두리채 떼어 한국 가요로 가져오는, 혁명적인 역할의 선봉이 된다. 또한, [[현진영]]과 같이 '''"한국어는 구조상 랩이 불가능하다."'''라는 당시 전문가들의 선입견을 무너뜨리고, '''댄스와 랩을 대중화'''시켰다. [[서태지와 아이들 2집|2집]] [[하여가(서태지와 아이들)|하여가]]에서 최초로 국악과 흑인음악([[힙합]]), 헤비메탈을 접목하고, [[서태지와 아이들 3집|3집]]에서는 랩 메탈, [[서태지와 아이들 4집|4집]]에서는 갱스터 랩 등의 앨범을 들고 나올 때마다 새로운 장르를 도입, 소개하면서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에 신선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기 직전 상황의 가요 톱텐에서는 [[태진아]]가 <거울도 안 보는 여자>로 1위를 하고 있었다. 물론 한국에서 보기 드문 다양한 음악색을 보여주던 [[조용필]], [[김연자]] 등의 성인 가요 네임드들이나 [[신승훈]], [[변진섭]]과 같은 세련된 발라드 가수들, [[김수철(가수)|김수철]], [[신해철]], [[현진영]] 등 해외 뉴웨이브를 받아들이던 음악인들도 음악산업 저변에서나마 힘을 썼으나, 이들의 대부분은 대중매체라 할 수 있는 TV보다 전문적 영역에서의 공연을 더 많이 했기에 당시 TV의 뒤쳐진 문화는 당시 10대·20대가 따라가고 싶던 힙합, 현대적인 댄스팝뮤직을 비롯한 "세계적인 트렌드"와의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80년대를 지나 민주화가 된 90년대가 되었지만 이미 사회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기지개를 켠 상황에서 새로운 유행을 따라가고 싶은 구매력까지 갖춘 10~20대들은 있는데, 만족시킬 만한 한국어 콘텐츠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랩뮤직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된 1990, 91년 바로 이듬해인 1992년도에 '한국어 랩'과 '회오리춤'을 들고 서태지가 나타났다.[* 힙합의 원류인 미국 본토에서 조차도 이 시기 이전까지는 힙합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이 '요 근래 주목받는 특이한 구조의 비주류 댄스 음악'에 가까웠다. 본격적으로 미국 음악계의 주류로 편입되고 열광하는 매니아를 만들기 시작한 시기는 1990년도 이후라고 봐야함이 옳다. 당장 미국 서부 힙합의 메이저화를 알린 The Chronic의 발매가 1992년 말로,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보다 몇 개월 더 느리다.] 10대, 20대들이 원하던 세계적인 트렌드와 한국 음악 사이의 간격이 기적과 같이 좁아지고 억눌려져 있던 젊은층의 수요가 한꺼번에 폭발하였던 것이다. 단순히 랩 음악을 한국에 반짝 유행시킨 정도가 아니라, 이로 인해 '''대한민국 가요계의 판도를 현대식 댄스뮤직과 랩뮤직으로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그 당시 문화적인 충격을 1990년대생 이후 세대들이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이러한데, 라디오는 7~8개[* 서울 기준으로 [[KBS]], [[MBC]], [[SBS]], [[기독교방송|CBS]], [[PBC]], [[TBS]], [[불교방송|BBS]], 그리고 [[AFKN]]. 전국망이 있는 라디오는 KBS와 MBC뿐이고 AFKN 외에는 아예 지방에서 들을 수도 없었다. 일부 남해안 지역 같은 데는 차라리 일본 방송이 더 잘 잡히던 시절이었다.]에 TV 채널은 지상파 5개[* KBS1, KBS2, MBC, SBS, EBS. 그나마 SBS는 이제 막 개국한 방송사였고, 지방에서 송출되지 않았으나 93년부터 중계유선방송을 통한 테이프넷이 허용되었다. [[AFKN]]은 일부 지역에서만 수신되는 영어방송이라 논외.]뿐이고, [[인터넷]]과 케이블 방송도 없었으며[* 1995년 3월 출범.] 인터넷 기능을 하던 전화접속 PC통신은 비싼 전화세가 문제였다.[* 1990년 통화 도수당 부과되던 전화요금이 1분당 요금으로 바뀌며 전화세 폭탄을 맞았다.] 일부 부잣집에서 전화선과 별도의 [[ISDN]] 회선을 끌어다 썼지만, 이것도 대부분 PC통신 접속용이었으며 일반인들 대부분은 인터넷 접속방법 자체를 몰랐다.[* 대충 이 당시는 PC통신 에뮬레이터로 [[모뎀]] 다이얼 업 -> PC통신 서비스 접속 -> 인터넷 서비스 메뉴 접속 -> [[winsock]] 프로그램 구동 -> [[넷스케이프]] 같은 [[웹 브라우저]]를 구동해서 [[월드 와이드 웹]](요즘 인터넷이라 말하는 것)을 켜거나 혹은 [[고퍼]], [[텔넷]] 서비스 이용 순이었다.] 한국에서 인터넷이 일반화된 것은 WinSOCK을 기본 내장한 [[윈도 95]]가 널리 퍼지면서부터이다. 이런 이유로 신문 구독률이 여전히 70%대에 이를 정도로, 지면을 통한 정보 수집이 주류일 시절이었다. 민주화가 정착되었다고 하지만 사회 분위기 때문에 TV에서는 머리를 기르거나 염색한 남자도 못 나온다.[* [[김종서(가수)|김종서]]는 장발이라는 이유로 KBS에서 출연금지를 당한 적도 있다.] 한국 영화는 흔히 말해 "내돈 주고 보기 아깝다."라는 수준이고[* 당시에는 스크린 쿼터라고 해서 의무적으로 한국 영화를 일정 기간 상영해야 했으며, 공연윤리위원회로부터 사전심의도 여전히 받아야 했다. 참고로 한국 영화의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1999년 영화 '''[[쉬리(영화)|쉬리]]'''의 등장과 이후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시작부터였다.], 방송에는 [[트로트]], 발라드, 템포만 빠른 정도의 댄스 가수 위주였다. 그런데 해외 팝 뮤직을 보면 한국과는 전혀 다르다. 형형색색 다양한 패션을 갖춘 형, 누나들이 훨씬 더 감각적이고 파격적인 음악을 하고 있고,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멋진 춤을 추고, 신선한 장르의 강렬한 노래를 부른다. 발라드도 좋지만, 해외의 가수들처럼 젊은 사람들 구미에 맞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 다행히, 경제 수준이 좋아지면서 [[마이마이]]와 같은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나 라디오 겸용 플레이어는 제법 보급이 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예전보다 음악을 접할 통로는 많아졌다. 90년대 이후 출생자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를 하자면, 물가대비 당시 카세트 플레이어는 지금의 [[닌텐도 스위치]] 가격 정도였고, 정품 카세트 테이프 앨범은 지금 물가 기준 대략 2만원 정도 수준이었으며, 레코더를 이용한 불법복제 테이프는 대략 5~7천원 정도 수준이었다. 정말 집안 형편이 어렵다면 이정도 비용도 학생들에게는 버겁겠지만, 그렇다고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할 정도는 아닐 정도로 플레이어 보급이 많이 이뤄질 시절이었다. 또한 휴대용 플레이어를 구할 정도 수준은 되지 않는 집에도 TV나 라디오는 이제 가정당 적어도 1대는 살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이 많이 내려갔기 때문에 당시 학생들은 TV나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는 휴대폰 및 삐삐가 부유층이나 직장인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늦은 저녁이 되면 친구와 집 눈치를 봐가며 집전화로 잠깐 대화를 하는게 전부였고, 저녁에는 가족끼리 둘러앉아 TV를 보고, 밤에는 [[별이 빛나는 밤에]]와 같은 라디오 방송을 듣는 정도가 문화생활의 전부였다. 그렇지만 TV를 틀면 어제 [[뮤직뱅크]]에서는 여전히 송가인이 수십 년째 지겹게 들어온 트로트로 5관왕을 했고 역시나 임영웅이 트로트 메들리로 지상파 방송사 가요 차트를 쓸고 있는 상황이다. 또 발라드 가수들이 신스음 하나 없는 브라스 밴드에 맞추어 부르고 있다. 그런데 오늘도 [[송가인]]이 이겼나 [[임영웅]]이 이겼나 보려고 TV를 틀었더니 난데없이 오늘 방탄소년단(이하 BTS)이라는 신인 그룹이 '피 땀 눈물'이란 랩과 강렬한 비트를 토대로 군무가 잘 짜여진 노래를 들고 나왔단다. 심지어 19세밖에 안 되었다는 멤버 RM의 자작곡이란다. 바로 어제까지 텔레비전을 틀면 트로트와 발라드 말고는 다른 음악은 듣기가 힘들었는데, 평생 그런 것을 보지 못했고 외국의 것을 갈망만 했던 10대, 20대가 듣고 보는 충격은 어느 정도였을까? 1990년대생 이후 시점으로 쳐 보면, 다음날 학교에서 아이들이 BTS 이야기만 하고 있지 않을까? 상술한 것처럼 완전히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방송에서 봤다고 생각해보자. [[1980년대]] 들어 영미의 팝음악은 다양한 장르의 탄생과 마이클 잭슨 등 대스타의 등장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국내에서도 이들 영미권 팝스타의 인지도는 특히 10~20대에게 대단해서 동네 레코드샵에서 빌보드 HOT 100 복사판을 나눠줄 정도였고 [[유로댄스]] 생소한 가수의 내한공연에도 만석을 이룰 정도였다. [[인터파크]] 같은 온라인 예매도 없었으니, 시내 대형서점까지 한나절을 잡고 직접 버스타고 가서 티켓을 사오거나, 은행을 통해 입금예매하는 게 전부였던 시절에도 그정도 열의로 공연을 찾아다니는 음악 팬들이 증가하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국내 음악시장은 과거 군사정권 시절부터 공윤의 검열 등의 영향으로 새로운 장르의 탄생보다는 정부가 지원하는 건전가요나 기성세대풍의 기존 음악 위주로 형성되었다. 즉, 세계의 유행을 좇아 새로운 장르를 받아들일 토양과 수요는 이미 1980년대 초중반부터 무르익었고, 경제적으로 구매력을 갖춘 10대들·20대들이 생겨났으나 한국 음악계가 거기에 맞춰주지 못한 것. 80년대, 90년대 초의 [[Wham!]], [[Duran Duran]], A-Ha, 바비 브라운 등등. 특히 그 당시의 10대 청소년들에게 [[뉴 키즈 온 더 블록]](이하 NKOB)의 인기와 파괴력은 엄청났다. 서태지 데뷔 바로 한 달 전의 NKOB 내한 당시 수십명이 부상당하고 깔려죽는 사망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벌어져서 공연이 중단될 정도였다.[* 당시는 공연에 대한 노하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당시 공연을 주관한 국내기획사 관중통제를 전혀 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10~20대 취향 컨텐츠 부족은 당시 합법적으로 수입이 금지되어 일반인들은 접하기 힘든 J-POP까지 손을 뻗히면서 [[쿠와타 케이스케]] 등 당대 일본의 유명 음악 또한 1980년대 후반 암암리에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했다. 참고로 그 시절은 반일감정이 지금보다 더 컸을 때이며 인터넷 같은 정보 매체가 부족했을 때였다.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이 아닌 한국 사람이 한국말로, 10대·20대 취향에 맞는 그러면서도 서양 사람들의 전유물로만 생각되었던 랩 등이 들어간 세련되고 독특한 음악과 춤을 선보였던 그 신선함과 파괴력은 엄청났다. NKOB나 듀란듀란같은 영미권 팝 아이돌이 가지고 있던 지분을 통째로 떼내어 한국인이 가져온 기념비적인 사건인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이전에는 아예 없었던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이전에도 댄스 곡을 했던 가수들이 꽤 있었다. [[나미(가수)|나미]], [[민해경]], [[소방차]], [[박남정]], [[김완선]] 등은 아이돌의 효시라 볼 수도 있고 빠른 댄스 음악을 하고 있었다. 이들도 분명히 의미가 있고 진보가 있는 노래를 발표했고 무대를 보여줬다. 그리고 흑인 음악을 기반으로 데뷔했고 절정의 기량을 가진 [[현진영]]도 있었다. [[https://blog.naver.com/jjjb1889/140016014483|#]] 한 블로거의 서태지에 관한 포스팅인데, 그는 서태지를 가장 위대한 한국 가수로 꼽고 있다. 서태지 이전과 이후는 하나의 단층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라디오에서 처음으로 난 알아요를 들었을 때는 평범했지만, 화면에서 봤을 때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것은 무슨무슨 장르를 도입했다는 말로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충격이 별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흑인음악이나 댄스음악을 도입했던 것은 사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아니고 먼저 하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은 파괴력이 달랐다. 실제로, 1990년대 당시의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고 서태지의 '[[난 알아요]]' 는 다같이 랩 가사까지 다 외우면서 쉽게 불러도 정작 어린아이들이 들을만한 [[동요]]는 거의 모르고 관심도 없으니 어버버거리고 한 소절도 따라부르지도 못했던 시대였다. 가장 좋은 예시가 한국형 흑인음악을 시도한 현진영이다. 당시 흑인음악에 관한 탁월한 이해도, 서태지 이상 가는 가창력, 그리고 한국 역대 최고의 댄서로 꼽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을 만큼 비교도 되지 않는 춤 실력을 가졌으며 서태지보다 상당히 먼저 데뷔하기까지 했다. 현진영과 와와 시절 그는 최고의 댄서인 구준엽과 강원래를 양옆에 거느리고 뛰어난 테크닉과 절정의 운동능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서태지의 장점이라고 흔히 말하는 흑인음악 도입도 그가 먼저 했다. 꽤 잘생기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흔히 말하는 서태지의 성공조건과 같다. 그럼에도 그는 서태지와 비슷한 급의 파급력은커녕 1류 인기가수라고 하기에도 어려웠고 약간 이름을 알린 정도였다. 그가 절정의 인기를 끌게 된 것은 흐린 기억 속의 그대, 현진영 go 진영 go 등을 통해 서태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무대를 보여주면서였다. 완성형 가수로 데뷔한 현진영의 가창력과 춤 실력은 짧은 시기 사이에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서태지 이후의 현진영 무대 구성이었다. 서태지 이전 현진영의 야한 여자, 슬픈 마네킹 등의 무대와 서태지 이후의 현진영이 보여주는 무대를 보면 결코 동일한 가수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차이가 있다. 나미와 붐붐도 인디언 인형처럼이 큰 인기를 끌었고 흑인음악 도입, 댄스, 붐붐의 랩, 쟈넷 잭슨의 영향을 받은 의상까지 꽤 인상적이지만 가요계의 조류를 바꾸고 그러지는 않았다는 것에서는 서태지 이전의 현진영과 와와와 비슷하다. 이쪽도 글로 늘어놓는 조건으로 따지면 서태지와 아이들과 별 차이가 없지만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서태지의 업적으로 말해지는 랩 역시 1990년에 인기가수였던 신해철이 방송무대에서 영어랩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특이함 때문에 한국 가요의 계보에서 잘 말해지지 않지만, 201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재조명되는 소위 탑골 GD 양준일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흑인음악을 하고 춤도 추는 양준일조차도 서태지 이전과 이후의 무대는 전혀 다르다. 시대를 엄청나게 앞섰다며 양준일에 대한 칭찬이 쏟아지는 무대들은 죄다 서태지 이후의 무대다. 흔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성공조건이라고 불리는 여러 조건들이 있다. 그렇지만 서태지 이전에도 그것을 갖추고 있던 다른 가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요계를 재편한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이었고, 그들이 등장한 이후에는 블로거의 표현대로 단층이라고 할 정도의 차이가 생겼고, 한국 가요계는 서태지가 분출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세례를 맞았기 때문에 더는 단순해질 수 없었다.[* 서태지보다 어렸거나 동년배인 안혜지, 윤영아 같은 아이돌형 댄스가수들이 있다. 수많은 어린 댄스 가수들이 그 급격한 단층에 적응하지 못해서 사라져갔을 때 흑인음악적인 기본기가 탄탄한 현진영은 서태지를 엄청나게 연구한 SM과 함께 그에 잘 적응해서 초인기 가수가 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무대에서 보여준 모든 모습, 그리고 무대 바깥에서 보여준 모습들이 기존 가수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단순히 적시에 적절한 음악 장르를 한국에 도입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그런 문법으로만 말한다면 양준일과 현진영은 이미 초인기가수가 됐어야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젊은 가수는 자기 색깔이 확고한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단층 아래에서 도태되었고, 자기 색깔을 지닌 가수들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렇게 서태지와 아이들의 형식으로 재편된 모습이 현재의 K-POP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